교회는 신앙공동체냐 조직공동체냐?-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서- | 김이곤 | 2013-02-08 | ||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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교회는 신앙공동체냐 조직공동체냐? -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서- <교회>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이냐? 라는 문제가 때로는 자주 논의의 중심 이슈가 되는 그 이유는, 교회가 그 본래적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면 자주 이 문제가 중심이슈로서 떠오르기 때문이다. 더욱이, 구원의 길을 찾아 교회에 출석하는 지상의 억조창생, 그들 개개인의 그 <구원>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. 물론, <교회>를 단지 인생에게 매우 필요한 단순한 <종교적 친교단체> 정도만으로서 그 의의를 느끼고 더 이상의 것, 이른 바, <인간구원> 문제나 <창조주 하나님(하느님)과 나와의 특수 관계> 문제 같은 것에는 별로 개의하지 않는 사람들, 이른 바, 자칭 자유로운 지성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이슈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, 그러나, <왜 ‘나’는 ‘무’(無)가 아니고 여기 이렇게 ‘존재하고 있는 것(유[有])’인가?> <과연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또 왜 나는 여기 이렇게 지금을 살고 있는가? 그리고 왜 나는 불가피하게 시간에 묻혀 늙어지고 마침내는 영면(永眠)하게 되는 것인가? 더욱이 그 다음(beyond)은, 그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이 ‘인생’이라는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?> <인생은 과시(果是)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?>라는 물음을 묻는 사람들에게는, 실로, 인생의 근원(根源)을 하나님(하느님)이라고 믿고 있는 <모임> (ekklesia)인 <교회>의 진정한 본질이란 과연 무엇인가? 라는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. 물론, 이 세상은 누군가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거나, 아니면, 우연히(?) 생겨나서 수억 년(137억년?)동안 자발적 진화를 해온 것이거나 하여,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(Heidegger, M)가 인간실존은 이 ‘세상에 던져진 것’(‘thrown into world’)일 뿐이라고 말하였듯이, 그렇게, 이 세상[宇宙萬物]도 또한, 어쨌든, ‘던져진 것’(Geworfenheit)이니까, ‘던져진 그대로 사는 그것이 최선’이 아니겠는가? 그러니까 신(神)을 믿으며 그 신(神)의 뜻을 궁구(窮究)하며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연친화적인 순리(順理)대로 사는 그것이야말로 최선이 아니겠느냐? 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. 그러나 인간은 <생각하는 갈대이다.> 그 무엇보다, 인간은, 성서가 말하는 대로라면,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어 생기(生氣)를 불어넣어 이룩하신 하나님의 ‘소유물’이다(창 2:7; 시100:3b). 그러므로 우리는 <인간>에 대해서 묻게 되고 또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을 <있게 하신 그 첫 원인>(the first Causer)에 대해서 묻게 된다. 이러한 문맥에서 보게 되면, 우리는 불가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‘믿음공동체’인 이 교회를 주목하게 되고 그것의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묻고 논(論)하게 되는 것이다. 그리하여, 나는 이러한 논의(論議)의 출발점으로서 <‘교회’는 ‘신앙공동체’(Gemeinschaft; faith-community)냐? 아니면 ‘조직공동체’(Gesellschaft; incorporated company/society [Inc.])냐?> 라는 질문을 그 논의의 주제로 선택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. 여기서 내가, 우선 그 두 개의 대칭적인 용어의 공동언어를 ‘공동체’(共同體)라고 말하는 그것은, 그 둘이 ①그 구조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 때문이고 그리고 또 ②그 상호유사성을 극대화하여 각자 자기 길을 계속 가면 극단적 ‘다른 극단’[異端]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.
신앙공동체(Gemmeinschaft: faith-comunity)와 조직공동체(Gesellschaft: Incorporate company)는, 그러므로, 본질적으로는 서로 다르다. 즉 그 두 공동체는 그 구조 조직에 있어서는 둘 다 ‘교회’라는 이름 아래 병존할 수는 있으나, 그러나, 전자는 구원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지만 후자는 구원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엄격히 구별된다. 둘 다 그 겉모양(그 법적 이름)은 모두 ‘교회’일 수는 있으나 전자(faith community)는 ‘참 교회’이고 후자(incorporate company, Inc.)는 ‘가짜[僞裝] 교회’이다. 전자는 비록 자기 약점을 가지고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하여 교인(양떼)들의 구원을 지향하는 ‘구원지향 교회’(faith community)이지만 후자는 비록 사회적 공헌과 기여가 매우 큰 것처럼 보이기는 하여도 기업적 이윤을 지향하는 ‘마켓지향 교회’(market church)일 뿐이라서, 이른 바, 하루가 바쁘게 늘어나는 일종의 ‘생선가게’[生鮮廛]와 같다고 하겠다. 생선전(生鮮廛)은 생선전이어야 하고 교회는 교회여야 한다.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리고 벨리알(anti-Christ, viz., devil, Satan, 신 13:13; 삿 19:22; 삼상 1:16; 2:12; 10:27; 25:17; 삼하 16:7; 나 1:15 고후 6:15; 살후 2:3)은 그 본질상 서로 조화 화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(고후 6:15-16a).
예언자들의 교회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. 그 예언자적 비판을 성서를 통해 고찰 분석해 보면, 아모스, 호세아, 이사야, 미가, 하박국, 예레미야, 에스겔 등등으로 이어지는 예언자들의 비판이 모두 교회예배/성전예배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가르치고 실천하는 데 있지 않는다는 데 있음을, 즉 신앙공동체적 성격(Gemeinschaft)을 지향(指向)하지 않고 세속 기업체(Gesellschaft: Inc.)적 성격을 지향한다는 데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. 이러한 현상은 소위 교회의 종교전쟁(교회 확대주의) 성향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반성의 엄연한 결과로 나타났다.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(crusade: 聖戰)과 이슬람의 ‘지하드’(jihad: 聖戰)를 통해서 볼 수 있다. 이것은 분명코(!!) 마태 28:18-20a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성서해석학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임이 확실하다.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(昇天)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(遺言)의 말씀인 마태 28:18-20은 다음과 같다.
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, “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, 그러므로,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[예수의]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. […]”하시니라. 현대 교회지도자들의 상당 부분의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유언(遺言)을 기독교의 양적 확대 내지는 더 과격하게는 <십자군 전쟁>(십자가를 받을 것이냐 아니면 칼을 받을 것이냐 라는 위협, cf. 코란을 받을 것이냐 칼을 받을 것이냐 라고 위협하는 이슬람의 지하드 논리)을 명령하신 것으로 <잘못>!!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. 이러한 잘 못된 가르침(잘 못된 성서해석)은 참 교회운동이 아니라 거짓 교회운동이다.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다(시편 1:6; 마태 5:20; 7:13-14). 이것이 교회가 ‘신앙공동체’(Gemeinschaft)가 되어야 하고 ‘조직공동체’(Gesellschaft)가 되지 말아야하는 그 이유이다. 이것이 또한 그 어떤 온건한 지성인들이 조심스레 마치 중용지도(中庸之道)를 가르치듯, ‘신앙공동체’와 ‘조직공동체’의 적절한 종합을 권유하는 그 온건 노선도 위험하다고 내가 감히 말하는 그 이유이다. 물론 참 교회의 모습인 <신앙공동체>도 마치 <선생과 제자 관계>가 불가불 존재하듯이 사회적 (계급) 조직이 필요하다. 목사(감독, 교황, 주교, 등등)-장로-권사-집사 등등의 조직도 필요하고 그 이외의 여러 부서 조직도 필요하며 그런 조직의 기능이 원활하게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것(교회법, 장로회 정치의 올바른 운동 등등)이 필요하다. 그러나 그 중심구조는 <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/삼위 일체 하나님>이어야만 한다. 목사, 감독, 주교 등등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서는 (종세교회의 교황처럼 되어서는) 결코(!) 안 된다. 목사, 감독, 주교 등등을 하나님으로 대신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모욕(신성모독)이요 기독교의 우상종교화이다. 김일성-김정일-김정은은 결코 삼위일체적인 유일신이 아니고 따라서 그 동상 앞에 절을 하는 것은 ‘멸망 받을 가증한 것’(to‘evah), 즉 ’적(敵) 그리스도적인 것‘일 뿐이다. 호세아의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. “내 백성이 [하나님에 대한] 지식(da‘ath ’elohim)이 없으므로 망하도다. 네가 [하나님에 대한] 지식을 버렸으므로[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므로]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…”(호 4:6)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(“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.” 마 27:54b; 막 15:39; 눅 23:47)께서도 예레미야 예언자처럼(렘 7:11) 교회 또는 성전[하나님의 집]을 “도적의 굴혈”로 보지 말 것(마 21:13; 막 11:17; 눅 19:46)을 열렬히 강조하셨던 것이다. 이 말씀 속에, <왜 예수 오신 후 2000년 세월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의 ‘파루시아’(재림, 자기 계시)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연히 지적되어 있는 것이다. 교회는 교회여야 한다. (Let the church be the church!) *앞으로의 칼럼은 <시편>에 대한 신학적 명상으로 진행할 계획입니다.*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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