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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나님 앞에서의 ‘축복’ - 창 27장 김이곤 2012-07-07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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형을 밀치고 들어와서, 그것도 반인륜적인 속임수를 사용하여, 연로하신 아버지(‘이삭’)신의 이름으로 장자 에서에게 내리려한 축복’(‘베라카’)을 가로챈 둘째 아들 야곱의 그 속이는 행위와 그리고 그 속이고 속임 당하는 과정 속에서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에 주고받은 전체 대화(27:1-38) 가운데 나타난 그 축복(‘베라카’)이라는 말의 개념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? 하는 것이 이번 장()에서 다룰 기본 주제이다.


물론
, 축복을 빼앗긴 자의 억울함을 아뢰는 장자 에서의 호소에 대한 아버지 이삭의 단호하고 냉정한 다음과 같은 대답,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./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./ 그러나 만일 네가 애써 힘을 기르면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네 스스로 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.”(27:39-40)라는 대답은, 지난 번 칼럼(칼럼 24: ‘운명과 자유’)에서 이미 언급한 바, <운명과 자유>의 관계문제가 또 한 번 더 동일한 의미로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다. 운명자유를 이끌지만 자유를 전적으로 폐기하지는 않는다. 그러나 이 장()에서서의 쟁점은 이러한 문맥 속에 등장한 매우 의외(意外)의 이 축복’(‘베라카’)이라는 말이 갖는 그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냐? 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, 여기서는 주로,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이라는 말의 그 신학적 의미 규명에 주로 초점을 맞추려 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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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여기서 말하는
축복’(‘베라카’)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, 우선 우리는, 시편 1편과 그 외의 여러 곳에서 말하는 ’/‘행복’(‘아쉬레 happiness 128편과 144편 참조)이라는 말과는 이 축복’(‘베라카blessing)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를 먼저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. 그 무엇보다, 시편 1편 등등에서 말하는 ’/‘행복이라는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더 강조점을 두어 사용하는 말인데 비()하여 축복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친히 선수(initiative)를 써서 부여하시는 그 선수행위에 더 강조점을 두고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. 물론, ‘축복이나 행복이나 간에 모두가 다 마지막에 와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행위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지만, 그 강조점은 현저하게 구별된다는 것이 성서가 강조하는 점이다. /행복’(‘아쉬레’; ‘마카리오스’)은 인간의 자유의지 행위에 대한 신의 보상적 성격을 강조하지만, 그러나 축복’(‘베라카’; ‘율로게토스’)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그 선수행위를 강조한다. 물론 둘 다의 그 구성내용은, 모두 히브리적인 사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, 주로 을 물질적 보상과 번영으로 보고는 있지만, 그 결국은 모두 신의 구원행위로 귀결된다.


그러나 이 장
()에서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<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으로서의 그 축복>의 의미규명에 있다. 왜냐하면 <하나님께서 선수를 사용하여 부여하신 그 축복>

 

항구적이고 절대적인 (sovereign power)을 갖고 있다는 점과 [동시에]

거센 파도치기를 통해서가는 운명전환의 기복(起伏)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

 

에서, 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보상으로서 받게 되는 그 [행복]’이라는 말과는 그 성격상 뚜렷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.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소서.”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, 따라서 받으소서.”라는 통상적인 말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. 즉 하나님께서 이삭[先祖]의 입을 통하여 두 아들, 야곱과 에서에게 선포한 축복, 성서의 문맥에서 보면, 그것은 분명 축복’(blessing)이지 ’(happiness)은 아닌 것이다. 따라서 목사나 사제가 예배 끝 부분에서 행하는 축도’(happiness)의 선포가 아니라 축복’(blessing)의 선포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지는 매우 궁금하다.


축복이라는 말은, 그러므로,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구원사적 의지를 강하게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. 즉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서라도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시며 복 주려 하시는 구원의 신이요 긍휼사랑의 신, ‘엘 라훔’(34:6)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. 이 증언이야 말로 복음인 것이다.


그러나 성서의 문맥에서 보면
, 특이하게도,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여 축복하셨다는 것은, 마치 운명이라는 말과 결부시킬 수 있을 정도로, 절대적인 통치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참으로 끈질기게, 그 선택하신 자와의 연결 관계를 결코 단념하시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축복구원에로 성취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. 이 사실은 구약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여러 구원사적 드라마들하나님의 종의 노래’(특히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’)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고 그리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(代贖)의 수난(受難)이라는 사건에서는 그 성취가 절정에 이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. 이 모든 구원사적 사건들을 우리의 본문은 감히 하나님의 축복사건(!)이라고 말하고 있다.


그러므로
야곱에서’, 그 두 아들에 대하여 아버지 이삭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행한 그 축복의 사건, ‘운명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끈질기게 두 아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. 그래서 에서가 살 땅은 척박한 땅일 뿐이다!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. 불평한다고 해서 척박한 땅이 주는 고난이 당장 해소되는 것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. 뿐만 아니라 야곱이 살 땅도, 비록 교활하게 속이는 자의 땅이라 할지라도!, 그 풍요로운 땅이 곧 척박해지지는 않는다. 축복의 위력은 부모의 힘[부모의 기도가 가진 힘]도 넘어선다. 거의!! 운명적이고 숙명적이라고 할만하다.


[내 아들아, 네가 받을 저주는 어미인 내가 대신 받으마.”(27:13)라고 어머니 리브가가 아들 야곱에게 한 말 참조, 그리고 에서에게 아버지 이삭이 남김 말, 내 아들아, 내가 그를 너의 주()로 세우고 그의 모든 친척들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, 이제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?”(27:37)라는 말도 참조하라.]


그러나 창
27:40b가 말하는 대로, 이 거대하고 절대적인 힘, 이른 바, 운명과도 같은 저 거대 세력도 다음과 같은 아들 에서에게 준 아버지 이삭의 말, 만일 네가 애써 힘을 기르면, 너는,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[=운명의 멍에]를 부술 수도 있을 것이다.”라는 말씀 앞에서는 기이하게도 그 운명적인 말이 상대화된다. 말하자면, <운명과 자유>대극’(對極)의 긴장 속에 있기는 하지만, 또한 자유가 아니라 운명이 모든 것을 주도하기는 하지만(자유운명을 좌우하지 못하기는 하지만), 그러나 운명자유를 무력/폐기시키지는 않는다. 이것이 신의 축복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격이며 그리고 그 고유성은 그것이 지닌 구원사적 성격을 통해서 우리가 불가역적(不可逆的)으로 인지할 수 있다.


그러므로
신의 축복’(blessing)은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만으로서 얻게 되는 ’(happi- ness)과는 그 성격이 엄격히 구별되는데, 왜냐하면 신의 축복(blessing)은 반드시 운명전이의 역사(運命轉移歷史=救援史的 傳承 歷史)라는 힘겨운 파도타기를 반드시 전제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. 아들 야곱에게 어머니 리브가가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.”(27:13)라고 하면서까지 장자의 배타적 특권에 감히 맞서서/항거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.


하나님은
, 실로, 인간을 축복하시는 분이시다. 축복의 의미는 야훼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이 행하는 축도’(祝禱)축사’(祝辭)에서도 즉 모든 종류의 <하나님 앞에서의 축복>(27:7)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.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(‘구원의 의지를 가지시고) 베푸시는 이 축복’(blessing), ‘운명전이’(運命轉移)의 파고(波高) 높고 험악한(47:9) 세월(passing on)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사적 섭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, 그러므로, 그것을 받는 자에게는 그것 때문에 특별한 믿음이 필요(!!)하게 된다. 왜냐하면 이 축복의 성취과정 속에는 행복을 파괴하고 그 행복에 역행하는 과정, 즉 일종의 인간으로서는 이겨내기 힘든 혹독한 신의 시험’(test)이라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.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경우와도 상응 일치하는 것이다.

 

최소한 매주 1회 이상은 야훼 하나님 앞에서’(=하나님의 이름으로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 의 이름으로) 축복을 받으시는 이 땅의 모든 평신도들!!!에게는, 그러므로, 그 축복을 받을 수 있을만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이라고 하겠다.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 풀어지는 축복은 그 축복의 성취과정에서 겪게 될 혹독한 신의 시험’(test of God)을 믿음으로 이겨내어야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.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 은 자에게는 모름지기 아브라함과 야곱이, 그리고 요셉과 모세가 가졌던 그런 믿음이 필 요하다고 하겠다. 왜냐하면 그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에는 반드시 시련극복을 전제한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.

 

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, 즉 야훼 하나님 앞에서 공적으로[祭儀的]으로 늘 축복(blessing)을 받는 우리 신앙인들은, 저들처럼, 즉 혹독한 신의 시험을 이겨내고 극복한 저들처럼, 즉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처럼(22), 얍복 강에서의 야곱처럼(32; 12:4[5]), 요셉의 집[總理 官舍]에서의 요셉처럼(45:4-15; 50:15-21),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나아가는 광야길, 어느 야숙 숙소(野宿 宿所)에서 모세 혹은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하신 야훼 하나님의 길을 두 팔로 가로막고 나서서 그와 대결한 모세의 아내 십보라처럼(4:24-26), 그리고 거듭, 거듭 반역하고 배신하는 음란한 선민(選民) 이스라엘을 죽음의 광야로 꾀어내어 pāṯāh, 2:14[16]> 40여년 세월동안이나 혹독하게 채찍질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징계행위를 보면서 오히려 그 하나님의 징계행위(‘가시와 담2:6[8]) 안에서 멸망할 선민(選民)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려 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그 참 사랑의 역설적(逆說的)인 구원교육 행위를 읽어낸 예언자 호세아처럼(2:6-7[8-9],14-15[16?17])!! 야훼 하나님의 심판행위, 특히, 야훼 하나님의 십자가 심판(저주, 21:22)행위를 통하여 오히려!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부활의 구원섭리를 읽어낼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.


이 신앙이
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이며, 이 신앙이야말로 마지막 심판을 이겨내는 진정한 승리의 신앙이라고 하겠다. 이러한 신앙의 참 깊이를 체득한 신앙인이야말로 기독교의 왜곡된 물량주의적인(바알주의적인) 거짓 신앙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다. 이러한 신앙인이야말로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가 범해 온 반() 기독교적, () 교회적, () 성서적 신앙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겠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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